III
인도 → 중국 · 7개 소주제

인도에서 중국으로 — 스투파가 사찰 안으로 들어와 탑이 되다

1. 인도 승원에 스투파가 통합되다

처음 승원과 스투파는 다른 역할을 맡았다. 승원은 승가의 거주·계율·교육 공간이고, 스투파는 사리를 중심으로 한 재가 예배의 공간이었다. 아쇼카 시대 이후 두 영역은 점차 가까워졌다. 전승은 아쇼카가 오래된 탑을 열어 사리를 다시 나누고 엄청난 수의 탑을 세웠다고 말한다. ‘8만 4천 탑’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이지만 대규모 확산의 의미를 담는다. 많은 사리탑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안정된 조직과 인력이 필요했고, 승가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기존의 탑이 승원 안으로 들어왔고, 다른 곳에서는 성스러운 탑 주위에 승원이 성장했다. 결국 승려의 생활과 재가자의 예배가 한 울타리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사찰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승원은 수행과 교육의 공간을 넘어 순례·공양·의례의 중심이 되었고, 스투파 역시 승가 생활과 분리된 외부 기념물이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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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이티야와 비하라

인도 서부의 석굴 사원은 예배 공간과 거주 공간의 구분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 준다. 비하라(vihāra)는 승려의 생활 공간으로, 개별 승방이 공동 홀을 둘러싸고 배치된다. 차이티야(caitya)는 스투파를 중심으로 한 예배 공간이다. 길게 뻗은 중랑 끝에 탑을 두고, 기둥 사이로 탑 뒤를 돌아 나올 수 있는 요잡로를 만든다. 의례가 평면을 직접 결정한 것이다. 공간은 단순히 사람을 수용하는 그릇이 아니라 시선과 움직임을 통제하고, 스투파와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데칸 지역의 수많은 석굴은 불교가 자연 암벽을 복합적인 승원 건축으로 전환한 과정을 보여 준다. 동시에 ‘승원’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거주, 공부, 명상, 접대, 예배를 담당하는 여러 공간의 체계라는 점을 드러낸다. 훗날 중국에서는 이 기능들이 목조건축의 탑, 불전, 강당, 승방으로 다시 분리되고 조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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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으로의 불교 전래

불교가 중국으로 이동할 때 경전, 불상, 사리는 건물보다 훨씬 쉽게 이동했다. 중국 전승은 후한 명제의 꿈과 가섭마등·축법란, 낙양 백마사를 불교 도입의 상징적 장면으로 전한다. 역사적 세부가 어떻든 핵심은 분명하다. 경전과 작은 불상, 사리는 장거리 운송이 가능하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다. 건물은 재료, 기후, 목수의 기술, 구조 지식, 지역의 건축 습관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인도 승원에 살았던 승려가 중국에서 같은 건물을 재현할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스투파가 그러했다. 사리는 도착했지만 반구형 인도 스투파가 그대로 복제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자신이 가진 건축 언어 속에서 사리를 담을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했다. 같은 불교 교리가 지역마다 전혀 다른 건축을 만든 이유는 바로 종교 내용과 건축 형식의 이동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축적 번역은 중국의 대규모 불교 석굴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산시성 다퉁 부근의 윈강 석굴(雲岡石窟)은 주로 5~6세기에 조성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온 형식이 중국적 기념 건축의 언어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뤄양 남쪽의 룽먼 석굴(龍門石窟)은 북위 때 시작되어 당대에 크게 확장되면서 절벽 자체를 예배 공간, 감실, 불상의 위계적 집합으로 바꾸었다. 더 서쪽 둔황의 모가오 석굴(莫高窟)은 4세기에 시작되어 거의 천 년 동안 확장되었고, 인도·중앙아시아·중국을 잇는 실크로드 교류를 증언한다. 이 세 유적은 단순한 조각의 집합이 아니라 불교가 공간, 동선, 불상, 후원 체계를 서로 다른 중국 환경에 맞게 변환한 건축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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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 건축과의 만남

불교 사리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이미 중국에는 정교한 목구조와 다층 누각 전통이 존재했다. 본문은 왕권과 천문 의례에 관련된 명당(明堂)을 스투파 변형을 이해하는 하나의 비교 대상으로 제시한다. 인도의 사리를 중국식 고층 건축에 봉안하면 반구형 봉분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건물은 수직으로 상승하고, 내부에 들어가며, 층을 오르고, 불상을 배치할 수 있다. 성스러움은 더 이상 닫힌 덩어리 안의 사리만으로 형성되지 않고 사람이 진입할 수 있는 공간과 결합한다. 그렇다고 인도 요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륜부의 찰주, 고리, 산개 계열의 형식은 스투파의 기억을 유지했다. 따라서 중국 탑은 중국식 건축 몸체와 인도계 사리 신앙이 결합한 혼성적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허난성의 숭악사탑(嵩岳寺塔)은 이러한 수용의 또 다른 단계를 보여 준다. 북위 523년에 세워진 이 탑은 중국에 남아 있는 초기 대형 전탑 가운데 하나이다. 다각형 평면, 강한 수직성, 반복되는 층 구성은 스투파의 사리 봉안 기능이 인도식 반구형 봉분이나 목탑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도 조적 건축으로 번역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숭악사탑은 스투파의 형식적 기억과 중국식 탑의 독자적 발전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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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도 스투파에서 중국식 탑으로

중국식 탑은 인도 스투파의 수평적·덩어리 중심 형식을 강한 수직 건축으로 바꾸었다. 여러 층을 쌓고 사각형 또는 팔각형 평면을 사용하며, 사리는 지하 기초실이나 상부에 봉안할 수 있었다. 각 층에는 불상과 예배 공간이 놓일 수 있어 탑은 사찰과 도시 경관의 시각적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상륜부의 찰주와 고리는 스투파의 계보를 계속 드러냈다. 중국식 탑은 인도 형식의 단순한 ‘늘이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의 중첩이다. 목탑에서는 외부를 도는 것뿐 아니라 내부로 들어가 층을 오르며 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기능적 복합성은 뒤에 벽돌과 석재가 확대되면서 다시 변했다. 두꺼운 벽과 좁은 내부 때문에 예배와 집회 기능이 전각으로 옮겨 갔고, 탑은 점차 사리와 상징을 강조하는 기념물로 남았다.

산시성 푸펑의 법문사(法門寺)는 이러한 형식 변화가 사리 신앙과 분리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탑 아래에서 발견된 지궁에는 부처의 손가락뼈로 신앙된 사리와 관련된 여러 사리기와 공양품, 그리고 당 왕실의 후원을 보여 주는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법문사는 중국 탑이 단순한 상징적 고층 건물이 아니라 탑의 축, 기단, 숨겨진 지하 공간을 이용해 사리 봉안의 복합 건축을 만들 수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그 안에서 사리, 귀중한 공양물, 정치 권력이 하나의 공간 체계로 결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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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탑적 건물: 사리·불상·순환

대형 목탑은 사리탑이면서 동시에 불전처럼 기능할 수 있었다. 사리를 봉안하는 동시에 여러 층에 서로 다른 불상을 배치하고,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내부에서 예배와 순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즉 신도는 닫힌 탑을 밖에서만 도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직적으로 배열된 불교 세계를 경험했다. 이런 탑은 사리, 불상, 요잡, 예배라는 기능을 하나의 건물에 집중시켰다. 오늘날 거대한 고대 목탑은 화재로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응현 목탑 같은 예는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복합성이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신도 수가 늘고 예배 대상이 다양해지면서 탑 내부는 좁아졌고, 강의와 집회를 위한 넓은 평면이 필요해졌다. 결과적으로 사찰은 하나의 거대한 수직 중심에서 여러 전문 전각으로 기능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이 독립 전각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산시성 오대산 일대의 두 중요한 건물에서도 확인된다. 남선사(南禪寺) 대전은 782년, 불광사(佛光寺) 동대전은 857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대 불교 목조건축을 전하는 가장 귀중한 유구들에 속한다. 이들은 탑이 아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불상, 집회, 의례가 넓은 수평형 전문 전각으로 옮겨 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기존에 언급한 응현의 불궁사 목탑과 함께 보면 중국 불교건축의 두 축, 즉 수직적인 사리탑과 목구조 예배 전각을 직접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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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목재에서 벽돌로

중국 탑이 목재에서 벽돌로 전환되면서 형식과 기능도 달라졌다. 북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큰 목재가 부족했고, 벽돌 재료가 풍부했으며, 화재에 강한 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벽돌은 단순한 재료 대체가 아니다. 벽이 두꺼워지고 내부 폭이 줄며, 목조처럼 자유로운 바닥과 층 구성도 어렵다. 탑은 높은 실루엣과 상징성을 유지했지만 내부 예배 기능의 상당 부분을 불전으로 넘겨주었다. 장안의 대안탑은 벽돌 탑이 만드는 질량감과 반복적 수직성을 잘 보여 준다. 이 변화는 동아시아 각 지역의 차이를 더욱 키웠다. 한국은 풍부한 화강암을 이용해 탑을 석조로 번역했고, 일본은 목탑 전통을 더 강하게 유지했다. 동일한 사리 신앙이 지역의 재료 환경과 만나 서로 다른 건축적 답을 만든 것이다.

중국의 조적 건축은 이후 서로 다른 여러 해답을 만들어 냈다. 장안의 소안탑(小雁塔)은 8세기 초에 세워져 대안탑보다 가늘고 긴 벽돌 실루엣을 보여 준다. 개봉의 철탑(鐵塔)은 북송 1049년에 건립되었으며 유약을 입힌 벽돌 장식으로 목조건축의 세부를 정교하게 모방한다. 취안저우 개원사(開元寺)의 두 석탑은 13세기에 세워져 불탑을 석재로 번역하는 방식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대안탑과 소안탑, 숭악사탑, 철탑, 개원사 쌍탑을 함께 보면 ‘중국식 탑’이 하나의 재료나 실루엣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목재, 벽돌, 유약 벽돌, 석재가 같은 사리탑의 계보를 반복해서 재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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