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승익(廉承益)과 고려 불교미술

인터랙티브 연구 · 고려

염승익 廉承益

충렬왕 忠烈王 치세의 권력, 신앙, 불교미술 제작.

고위 관료이자 몽골어 통역관이며 국왕의 측근이었던 독실한 불교 신자 염승익(?–1302)은 고려 조정, 사원, 석탑 복원, 사경, 불화 발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인물이다.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南溪院址七層石塔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Bart0278 촬영, CC BY-SA 3.0 · 출처 ↗
01 · 조정의 인물

충렬왕 치세의 중심에 선 염승익

『고려사』高麗史의 염승익 열전은 그를 국왕의 가까운 측근으로 전한다. 그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277년이다. 충렬왕이 병환 중 천효사 天孝寺에 머물렀을 때 염승익은 왕을 수행하며 치료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궁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왕권과 불교 제도 사이를 잇는 중개자가 되었다.

염승익은 몽골어를 구사하며 대도에서 온 사신들을 위한 통역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고려 왕국과 원 조정 사이의 관계를 중개한 고위 관료층에 속했다. 동시에 그의 불교 신앙은 시주, 의례 실천, 불교미술 발원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가 염승익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염승익은 단순한 개인 발원자로도, 행정 관료로서의 역할만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왕권, 행정 자원, 사원, 장인, 사경승과 서사자, 발원 의례를 서로 연결하였다.

주요 사료: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폐행」 계열에 실린 염승익 전기; Bryan Sauvadet 박사학위논문 제1장 § 1.1.2.2.1.

충렬왕 忠烈王왕권
대도·원 조정 元사행 · 몽골어
개경의 사원복원 · 법회
염승익 廉承益중개자
왕실 사경소 金字大藏寫經所금자 사경
불교 실천발원 · 치유 · 공덕
공유 孔愉1283년 임무
02 · 인터랙티브 연표

조정, 사원, 불교미술 발원을 오간 경력

염승익의 종교 네트워크와 의례 순환을 개경, 사찰, 문헌, 원 네트워크의 관계로 정리한 인포그래픽.
종교 네트워크와 의례의 순환. 염승익을 중심으로 충렬왕의 궁정, 개경의 사찰과 탑, 경전과 다라니, 원의 불교 네트워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종합한 도식.
1277

병든 국왕 곁에서

염승익은 충렬왕을 따라 천효사 天孝寺로 가서 왕의 치료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국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조정치유
1278

정치적 상승

국왕의 총애는 승진과 국정 논의에 참여하는 지위로 이어졌다.

『고려사』, 권 123, 8a–11a.

조정
1280

현화사 玄化寺

충렬왕과 한 왕실 여성의 명에 따라 염승익은 현화사에 새 전각을 건립하게 한다. 여기서 그는 왕실 명령을 수행하는 감독자로 행동한다.

『고려사』, 권 29, 9a–b.

왕명건축
1281

염승익의 별서에 설치된 사경소

염승익은 자신의 별서 한 곳을 왕실에 제공하여 금자로 대장경을 사경하는 왕실 사경소, 즉 금자대장사경소 金字大藏寫經所를 설치하게 했다.

사경소사경
1283

수도의 석탑을 복원하다

충렬왕은 염승익과 공유 孔愉에게 현화사, 왕륜사, 남계원, 그리고 개국사의 한 별원에 있는 석탑의 복원을 감독하게 했다. 같은 시기 염승익이 남계원 석탑과 관련된 『묘법연화경』을 발원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사』, 권 29, 45a.

왕명개인 발원
1286

아미타여래도 阿彌陀如來圖

염승익은 왕실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복과 장수, 그리고 정토 왕생을 발원하며 아미타여래도를 제작하게 한다.

불화발원
1289

대도행

염승익은 왕과 왕비를 수행해 대도로 가며 고려와 원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차지한 위치를 드러낸다.

『고려사』 권 123, 8a–11a의 염승익 전기도 참조.

조정원
1292

보협인다라니 寶篋印陀羅尼

목판과 그 인출물은 또 다른 후원 형태를 보여준다. 즉 의례적 효험을 위해 반복 생산할 수 있는 문자-이미지의 제작이다.

목판인쇄다라니
1293

다시 대도로

염승익은 다시 왕과 왕비를 수행한다.

『고려사』, 권 123, 8a–11a 참조.

조정원
1295

질병으로 인한 은퇴

질병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그의 종교적 실천은 중단되지 않았다.

『고려사』 권 123, 8a–11a 참조.

질병
1297

의례와 치유

왕실 여성의 병환 때 염승익은 다시 조정에 불려와 극단적인 신앙 실천을 행했다. 이는 그의 치유자적 명성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의례치유
1302

출가와 죽음

새 관직 임명을 거절한 염승익은 관작을 반납하고 승려가 되었으며 같은 해 사망했다.

『고려사』, 권 32, 10a; 권 123, 8a–11a도 참조.

출가
03 · 핵심적인 구분

왕명을 수행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발원하는 것은 다르다

사료는 서로 다른 성격의 사업을 염승익과 연결한다. 이를 혼동하면 실제로는 충렬왕의 발의에 따른 사업을 염승익 개인의 발원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왕명 · 충렬왕이 명함

염승익이 감독하거나 수행

  • 1280: 현화사 玄化寺 전각 건립.
  • 1283: 개경의 여러 불교 시설 석탑 복원 임무.
개인 발원 · 염승익이 발원문을 제시

현존하거나 문헌으로 확인되는 세 작품

  • 1283년경: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 1286: 아미타여래도 阿彌陀如來圖.
  • 1292: 보협인다라니 寶篋印陀羅尼.
04 · 1283년 7월

석탑 복원 임무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훼손 이후 충렬왕은 염승익과 공유에게 수도의 불교 시설을 순회하며 복원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긴다. 논문에서 확인한 동선은 네 곳을 연결한다.

1280년부터 1281년까지 개경 주변의 현화사, 왕륜사, 남계원에서 이루어진 불교 조영과 탑 복원을 보여주는 개략도.
개경 주변의 탑 복원과 불교 조영. 현화사, 왕륜사, 남계원을 중심으로 염승익이 관여한 건립·보수·복원 사업을 정리한 개략도.
01

현화사

玄化寺

1280년 왕실 건축 명령을 통해 이미 염승익과 관계된 사원.

02

왕륜사

王輪寺

복원 대상에 포함된 수도의 주요 불교 시설 중 하나.

03

남계원

南溪院

현존 석탑을 통해 건축, 복원, 경전 봉안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핵심 사례.

04

개국사

開國寺

논문에서 사용한 사료에는 개국사의 한 별원도 이 복원 임무에 포함된다.

문헌 사료: 『고려사』 高麗史, 권 29, 45a. 소실된 건물의 모습을 임의로 복원하지 않으며, 현재 건축과 관련 유물이 확인되는 남계원만 물질문화 사례로 상세히 다룬다.

05 · 건축과 봉안

남계원 南溪院: 의례적 용기로서의 석탑

개성 인근 남계원지에서 옮겨온 칠층석탑은 염승익의 생애와 작품의 물질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지점이다. 20세기 초 탑을 해체·이전하는 과정에서 내부에서 불교 경전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 開城 南溪院址 七層石塔 · Bart0278 촬영,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
7

칠층 석탑과 일곱 권의 경전

현재 이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감지에 금속성 안료로 필사한 경전 두루마리의 발견은 이 석탑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봉안 공간으로 이해하게 한다.

명칭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한자
南溪院址七層石塔
출토·원위치
개성, 고려
염승익의 역할
1283년 왕명에 따른 복원 감독 · 『고려사』 권 29, 45a
지정
대한민국 국보 제100호
1

석조 기념물

석탑은 개경의 경관 속에 불교적 현존을 물질화한다.

2

내부 공간

봉합 뒤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건축 내부가 형성된다.

3

경전 봉안

경전은 일상적인 독서 대상이 아니라 탑 안에 결합된 발원물로 기능한다.

4

사리적 현존

논문에서 제시한 해석에 따르면 경전은 법사리로 기능하며 석탑의 봉안과 성화에 참여한다.

남계원지 칠층석탑 옛 사진과 내부에서 발견된 일곱 권의 경전
석탑 이전 당시의 옛 사진과 발견된 일곱 권의 두루마리 · Lim Young-ae, 2024 재수록 · 원문 보기 ↗
06 · 1283년경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사리로서의 경전’

발문은 염승익을 발원자로 명시한다. 남계원 석탑의 복원과 결부되면서 이 경전은 단순한 고급 사경을 넘어 봉안 장치에 넣기 위해 제작된 의례적 대상이 된다.

염승익 발원 묘법연화경의 발원문
염승익 발원 『묘법연화경』 관련 발원문 · Lim Young-ae, 2024 재수록 · 출처 ↗
1283

텍스트, 이미지, 봉안

명칭
묘법연화경
한자
妙法蓮華經
McCune–Reischauer
Myobŏp yŏnhwagyŏng
발원자
염승익 廉承益
재료
감지, 금속성 안료 사경
기능
발원, 성화, 석탑 내부 봉안
남계원 『묘법연화경』 제1권 변상도. 감지에 금니로 그린 분노상의 호법상
남계원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제1권 변상도, 1283년경 · 감지, 금·은 · 국립중앙박물관.
도상 분석

‘사리로서의 경전’에 응축된 호법상

남계원 석탑 塔 안에서 발견된 일곱 권 가운데 제1권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감지 위에 본문을 은니로 사경하고, 표지와 변상도는 금니로 제작하였다. 이 이미지는 도상 구성이 매우 간결하다. 복잡한 설화 장면 대신, 연화좌 蓮華座 위에 서서 오른손에 큰 금강저 金剛杵(kŭmgangjŏ)를 든 분노상의 호법상 한 구만을 독립적으로 제시한다.

몸은 왼쪽을 향하지만 머리는 반대쪽으로 돌려져 있다. 두드러진 근육, 움직임을 강조한 옷주름, 긴장된 팔, 머리를 둘러싼 화염문은 이 상에 역동적이고 수호적인 존재감을 부여한다. 이 구성은 경전의 내용을 서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법 法의 힘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시킨다. 양식적으로는 1275–1276년경 제작된 도상 사경 經의 호법상과 매우 가깝고, 특히 『불공견삭신변진언경』과 문수사리보살 文殊師利菩薩 관련 경전의 도상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성은 사경의 봉안 목적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일곱 권은 계속 보이도록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283년에 복원된 석탑 塔 내부에 봉안되었다. 따라서 이 이미지는 관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응축되어 실제 의례적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형은 ‘사리로서의 경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스러운 경문과 호법 이미지, 그리고 이들을 봉안한 석탑이 함께 하나의 봉헌·성화 장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에서 경전의 현존을 여래 如來의 몸 자체의 현존과 연결하는 구절과도 맞닿아 있다.

1283년경 염승익이 발원하고 남계원 석탑에서 발견된 이 사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통되는 발원 게송
願我臨欲命終時 · 盡除一切諸障礙 · 面見彼佛阿彌陀 · 即得往生安樂刹
“내가 목숨을 마치려는 때에 모든 장애가 다 소멸되고, 저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곧 안락국에 왕생하기를 원하나이다.”
이 네 구절의 게송은 염승익 발원 『묘법연화경』과 1286년 아미타여래도를 연결한다. 여기에는 발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번역을 제시했으며, 실제 발문 전체는 더 길다.
사경성스러운 텍스트의 물질적 제작
발원국왕 · 가족 · 발원자
봉안두루마리를 석탑 내부에 넣음
봉함시야와 일상적 접근에서 분리
성화텍스트를 작동하는 현존으로 만듦
07 · 1286

아미타여래도 阿彌陀如來圖: 기도가 이미지가 되다

남계원 복원에서 3년 뒤 염승익은 아미타여래도를 발원한다. 화기에는 국왕과 왕실 여성, 염승익 가족의 복과 장수, 그리고 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1286년 염승익 발원 아미타여래도
아미타여래도, 1286년, 구 시마즈가 소장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
1286

글쓰기에서 신앙 이미지로

명칭
아미타여래도
한자
阿彌陀如來圖
McCune–Reischauer
Amit’a yŏraedo
발원자
염승익 廉承益
연대
1286 · 지원 23년 至元二十三年
발원
장수, 보호, 아미타 정토 왕생

『묘법연화경』과의 관계는 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네 구절의 게송이 두 작품군에 등장한다. 석탑 안에 봉안된 글과 예배를 위한 이미지는 같은 발원적 지평에 놓여 있다.

08 · 1292

다라니가 판본과 이미지가 되다

염승익의 감독 아래 제작된 보협인다라니 寶篋印陀羅尼는 다른 물질적 논리를 보여준다. 단일한 유일본이 아니라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목을 통해 의례용 인쇄물을 반복 생산할 수 있었다.

염승익과 관련된 1292년 보협인다라니 만다라
보협인다라니 만다라, 1292년 · Lim Young-ae, 2024 재수록 · 출처 ↗
1292

반복 생산 가능한 문자-이미지

이 유물은 텍스트, 도식적 구조, 의례적 효험을 결합한다. 목판인쇄는 염승익의 후원 방식도 변화시켰다. 하나의 판목에서 여러 인출물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봉안과 성화의 맥락 속에서 유통될 수 있었다.

기법
목판인쇄
텍스트
보협인다라니 寶篋印陀羅尼
염승익의 역할
제작 관련 명문을 통해 감독 사실 확인
기능
보호, 공덕, 의례적 효험
09 · 세 개의 이정표

1283 → 1286 → 1292: 염승익의 개인 발원을 따라가기

작품을 매체별로 분리해 보기보다 연속해서 보면 보호, 장수, 공덕, 구원이라는 동일한 관심사가 필사에서 불화, 다시 인쇄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남계원 석탑과 관련된 경전 두루마리
1283년경 · 사경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발원 사경, 석탑 봉안, 그리고 텍스트의 사리적 현존으로의 전환.

1286년 염승익 발원 아미타여래도
1286 · 이미지

아미타여래도

阿彌陀如來圖

정토 왕생이라는 동일한 발원적 지평을 시각화한 신앙 이미지.

1292년 염승익 관련 보협인다라니 만다라
1292 · 인쇄

다라니

寶篋印陀羅尼

목판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분리하지 않은 채 의례 대상을 반복 생산하게 한다.

발원자염승익 廉承益
의도보호 · 장수
실천사경 · 불화 · 인쇄
대상경전 · 불화 · 다라니
지향공덕 · 구원 · 정토
10 · 개경 開京

수도의 불교 제도 속에 놓인 염승익의 동선

염승익의 생애는 개경의 여러 주요 사원과 교차한다. 그러나 이 페이지는 수도의 전체 불교 네트워크 지도를 반복하지 않고 염승익의 동선만을 추려 보여준다. 천효사 → 현화사 → 왕실 사경소 → 석탑 복원 임무 → 남계원.

천효사天孝寺 · 1277
현화사玄化寺 · 1280
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 · 1281
왕명여러 석탑 · 1283
남계원南溪院 · 경전 봉안
1293년 염승익이 개경에서 원의 대도로 이동한 경로와 대도에서의 궁정 및 불교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인포그래픽.
개경에서 대도로. 1293년 대도행과 원 조정, 불교계, 문헌·인쇄물의 유통을 연결해 보여주는 시각적 개략도.
11 · 1295–1302

질병, 은퇴, 그리고 출가

염승익 생애의 마지막 시기는 그의 종교적 후원을 더욱 일관되게 이해하게 한다. 1295년 건강 문제로 정치에서 물러났고, 2년 뒤에는 치유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다시 왕실과 접촉하게 된다. 1302년 새 관직을 거부한 뒤 관작을 반납하고 출가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생애 전반: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1302년: 권 32, 10a.

1295

은퇴

질병은 정치 활동을 중단시켰지만 종교 실천까지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1297

치유와 신앙

조정은 치료와 의례가 필요한 상황에서 계속 염승익을 찾았다.

1302

승려가 되다

관작을 최종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역할과 불교적 실천이 공존했던 생애가 마무리된다.

12 · 염승익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

단순한 발원자라기보다 ‘중개자’에 가까운 인물

염승익의 사례는 고려 불교미술을 조정된 행위들의 결과로 이해하게 한다. 왕의 결정, 행정 임무, 사원, 사경소, 발원물, 의례 행위가 하나의 행위 사슬 속에 결합될 수 있었다.

王

권력의 인물

충렬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조정의 자원과 주요 불교 시설에 접근했다.

願

불교 실천자

발문과 명문에는 건강, 보호, 공덕, 정토 왕생이라는 개인적 관심이 드러난다.

像

중개자

건축, 사경, 불화, 인쇄를 연결하지만 각 매체의 기능과 발원 지위는 동일하지 않다.

사료와 방법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구성한 페이지

텍스트와 해석 구조는 우선 염승익, 남계원 『묘법연화경』, 충렬왕대 불교미술 제작을 다룬 논문의 장들에 기초한다. 사실 관계는 1차 사료와 최근 연구를 교차 검토하였다.

주요 사료와 참고문헌

편집 원칙

  • 라틴 문자로 한국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McCune–Reischauer 체계를 따른다.
  • 주요 인물, 기관, 작품의 첫 등장에 한자를 병기한다.
  • 왕명에 따른 임무와 개인 발원을 명확히 구분한다.
  • 유물 자체로 정확한 연도가 확정되지 않는 경우 ‘1283년경’처럼 신중하게 표기한다.
  • 그래픽 재구성은 설명용 인포그래픽이며 고고학적 복원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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