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국왕 곁에서
염승익은 충렬왕을 따라 천효사 天孝寺로 가서 왕의 치료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국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고려사』高麗史의 염승익 열전은 그를 국왕의 가까운 측근으로 전한다. 그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277년이다. 충렬왕이 병환 중 천효사 天孝寺에 머물렀을 때 염승익은 왕을 수행하며 치료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궁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왕권과 불교 제도 사이를 잇는 중개자가 되었다.
염승익은 몽골어를 구사하며 대도에서 온 사신들을 위한 통역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고려 왕국과 원 조정 사이의 관계를 중개한 고위 관료층에 속했다. 동시에 그의 불교 신앙은 시주, 의례 실천, 불교미술 발원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가 염승익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염승익은 단순한 개인 발원자로도, 행정 관료로서의 역할만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왕권, 행정 자원, 사원, 장인, 사경승과 서사자, 발원 의례를 서로 연결하였다.
주요 사료: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폐행」 계열에 실린 염승익 전기; Bryan Sauvadet 박사학위논문 제1장 § 1.1.2.2.1.
염승익은 충렬왕을 따라 천효사 天孝寺로 가서 왕의 치료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국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국왕의 총애는 승진과 국정 논의에 참여하는 지위로 이어졌다.
『고려사』, 권 123, 8a–11a.
충렬왕과 한 왕실 여성의 명에 따라 염승익은 현화사에 새 전각을 건립하게 한다. 여기서 그는 왕실 명령을 수행하는 감독자로 행동한다.
『고려사』, 권 29, 9a–b.
염승익은 자신의 별서 한 곳을 왕실에 제공하여 금자로 대장경을 사경하는 왕실 사경소, 즉 금자대장사경소 金字大藏寫經所를 설치하게 했다.
충렬왕은 염승익과 공유 孔愉에게 현화사, 왕륜사, 남계원, 그리고 개국사의 한 별원에 있는 석탑의 복원을 감독하게 했다. 같은 시기 염승익이 남계원 석탑과 관련된 『묘법연화경』을 발원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사』, 권 29, 45a.
염승익은 왕실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복과 장수, 그리고 정토 왕생을 발원하며 아미타여래도를 제작하게 한다.
염승익은 왕과 왕비를 수행해 대도로 가며 고려와 원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차지한 위치를 드러낸다.
『고려사』 권 123, 8a–11a의 염승익 전기도 참조.
목판과 그 인출물은 또 다른 후원 형태를 보여준다. 즉 의례적 효험을 위해 반복 생산할 수 있는 문자-이미지의 제작이다.
염승익은 다시 왕과 왕비를 수행한다.
『고려사』, 권 123, 8a–11a 참조.
질병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그의 종교적 실천은 중단되지 않았다.
『고려사』 권 123, 8a–11a 참조.
왕실 여성의 병환 때 염승익은 다시 조정에 불려와 극단적인 신앙 실천을 행했다. 이는 그의 치유자적 명성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새 관직 임명을 거절한 염승익은 관작을 반납하고 승려가 되었으며 같은 해 사망했다.
『고려사』, 권 32, 10a; 권 123, 8a–11a도 참조.
사료는 서로 다른 성격의 사업을 염승익과 연결한다. 이를 혼동하면 실제로는 충렬왕의 발의에 따른 사업을 염승익 개인의 발원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훼손 이후 충렬왕은 염승익과 공유에게 수도의 불교 시설을 순회하며 복원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긴다. 논문에서 확인한 동선은 네 곳을 연결한다.
1280년 왕실 건축 명령을 통해 이미 염승익과 관계된 사원.
복원 대상에 포함된 수도의 주요 불교 시설 중 하나.
현존 석탑을 통해 건축, 복원, 경전 봉안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핵심 사례.
논문에서 사용한 사료에는 개국사의 한 별원도 이 복원 임무에 포함된다.
문헌 사료: 『고려사』 高麗史, 권 29, 45a. 소실된 건물의 모습을 임의로 복원하지 않으며, 현재 건축과 관련 유물이 확인되는 남계원만 물질문화 사례로 상세히 다룬다.
개성 인근 남계원지에서 옮겨온 칠층석탑은 염승익의 생애와 작품의 물질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지점이다. 20세기 초 탑을 해체·이전하는 과정에서 내부에서 불교 경전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현재 이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감지에 금속성 안료로 필사한 경전 두루마리의 발견은 이 석탑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봉안 공간으로 이해하게 한다.
석탑은 개경의 경관 속에 불교적 현존을 물질화한다.
봉합 뒤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건축 내부가 형성된다.
경전은 일상적인 독서 대상이 아니라 탑 안에 결합된 발원물로 기능한다.
논문에서 제시한 해석에 따르면 경전은 법사리로 기능하며 석탑의 봉안과 성화에 참여한다.

발문은 염승익을 발원자로 명시한다. 남계원 석탑의 복원과 결부되면서 이 경전은 단순한 고급 사경을 넘어 봉안 장치에 넣기 위해 제작된 의례적 대상이 된다.

남계원 석탑 塔 안에서 발견된 일곱 권 가운데 제1권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감지 위에 본문을 은니로 사경하고, 표지와 변상도는 금니로 제작하였다. 이 이미지는 도상 구성이 매우 간결하다. 복잡한 설화 장면 대신, 연화좌 蓮華座 위에 서서 오른손에 큰 금강저 金剛杵(kŭmgangjŏ)를 든 분노상의 호법상 한 구만을 독립적으로 제시한다.
몸은 왼쪽을 향하지만 머리는 반대쪽으로 돌려져 있다. 두드러진 근육, 움직임을 강조한 옷주름, 긴장된 팔, 머리를 둘러싼 화염문은 이 상에 역동적이고 수호적인 존재감을 부여한다. 이 구성은 경전의 내용을 서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법 法의 힘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시킨다. 양식적으로는 1275–1276년경 제작된 도상 사경 經의 호법상과 매우 가깝고, 특히 『불공견삭신변진언경』과 문수사리보살 文殊師利菩薩 관련 경전의 도상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성은 사경의 봉안 목적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일곱 권은 계속 보이도록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283년에 복원된 석탑 塔 내부에 봉안되었다. 따라서 이 이미지는 관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응축되어 실제 의례적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형은 ‘사리로서의 경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스러운 경문과 호법 이미지, 그리고 이들을 봉안한 석탑이 함께 하나의 봉헌·성화 장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에서 경전의 현존을 여래 如來의 몸 자체의 현존과 연결하는 구절과도 맞닿아 있다.
1283년경 염승익이 발원하고 남계원 석탑에서 발견된 이 사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계원 복원에서 3년 뒤 염승익은 아미타여래도를 발원한다. 화기에는 국왕과 왕실 여성, 염승익 가족의 복과 장수, 그리고 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묘법연화경』과의 관계는 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네 구절의 게송이 두 작품군에 등장한다. 석탑 안에 봉안된 글과 예배를 위한 이미지는 같은 발원적 지평에 놓여 있다.
염승익의 감독 아래 제작된 보협인다라니 寶篋印陀羅尼는 다른 물질적 논리를 보여준다. 단일한 유일본이 아니라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목을 통해 의례용 인쇄물을 반복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유물은 텍스트, 도식적 구조, 의례적 효험을 결합한다. 목판인쇄는 염승익의 후원 방식도 변화시켰다. 하나의 판목에서 여러 인출물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봉안과 성화의 맥락 속에서 유통될 수 있었다.
작품을 매체별로 분리해 보기보다 연속해서 보면 보호, 장수, 공덕, 구원이라는 동일한 관심사가 필사에서 불화, 다시 인쇄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발원 사경, 석탑 봉안, 그리고 텍스트의 사리적 현존으로의 전환.

정토 왕생이라는 동일한 발원적 지평을 시각화한 신앙 이미지.

목판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분리하지 않은 채 의례 대상을 반복 생산하게 한다.
염승익의 생애는 개경의 여러 주요 사원과 교차한다. 그러나 이 페이지는 수도의 전체 불교 네트워크 지도를 반복하지 않고 염승익의 동선만을 추려 보여준다. 천효사 → 현화사 → 왕실 사경소 → 석탑 복원 임무 → 남계원.
염승익 생애의 마지막 시기는 그의 종교적 후원을 더욱 일관되게 이해하게 한다. 1295년 건강 문제로 정치에서 물러났고, 2년 뒤에는 치유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다시 왕실과 접촉하게 된다. 1302년 새 관직을 거부한 뒤 관작을 반납하고 출가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생애 전반: 『고려사』 高麗史, 권 123, 8a–11a; 1302년: 권 32, 10a.
질병은 정치 활동을 중단시켰지만 종교 실천까지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조정은 치료와 의례가 필요한 상황에서 계속 염승익을 찾았다.
관작을 최종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역할과 불교적 실천이 공존했던 생애가 마무리된다.
염승익의 사례는 고려 불교미술을 조정된 행위들의 결과로 이해하게 한다. 왕의 결정, 행정 임무, 사원, 사경소, 발원물, 의례 행위가 하나의 행위 사슬 속에 결합될 수 있었다.
충렬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조정의 자원과 주요 불교 시설에 접근했다.
발문과 명문에는 건강, 보호, 공덕, 정토 왕생이라는 개인적 관심이 드러난다.
건축, 사경, 불화, 인쇄를 연결하지만 각 매체의 기능과 발원 지위는 동일하지 않다.
텍스트와 해석 구조는 우선 염승익, 남계원 『묘법연화경』, 충렬왕대 불교미술 제작을 다룬 논문의 장들에 기초한다. 사실 관계는 1차 사료와 최근 연구를 교차 검토하였다.